2025/06/22 14

함민복- 서울역 그 식당

서울역 그 식당 함민복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어디론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를 끌어정수기에 물 담는데 열중인 그대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황동규- 조그만 사랑 노래

조그만 사랑 노래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늘 그대 뒤를 따르던길 문득 사라지고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여기저기서 어린 날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다.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성긴 눈 날린다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몇 송이 눈.

안도현- 연탄 한 장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연탄차가 부릉부릉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을 퍼먹으면서도 몰랐네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김용택- 그 여자네 집

그 여자네 집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 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김소월-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김소월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만수산에 올라서서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도오늘밤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좀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제석산에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 님의 무덤에 풀이라도 태웠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