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1 14

요시노 히로시- 축혼가

축혼가 요시노 히로시 두 사람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어수룩한 편이 좋다.너무 훌륭하지 않은 편이 좋다.너무 훌륭하면오래 가지 못한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완벽을 지향하지 않는 편이 좋다.완벽 따위는 부자연스럽다고큰 소리 치는 편이 좋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인가장난치는 편이 좋다.발랑 넘어지는 편이 좋다. 서로 비난할 일이 있어도 비난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었는지나중에 되돌아 봄이 좋다. 바른 말을 할 때 조심스레 하는 편이 좋다.바른 말을 할 때상대를 마음 상하게 하기 쉽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훌륭해지고 싶거나 올바르고 싶다고 마음 쓰지 말고 천천히 느긋하게햇빛을 쬐고 있는 편이 좋다. 건강하게 바람에 흔들리며살아 있는 것의 그리움에 문득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날이 있어도 좋다. 그리고 어째서 가슴이..

만해 한용운- 사랑하는 까닭

사랑하는 까닭 만해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 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만해 한용운- 인연설2

인연설2 만해 한용운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함께 있을 수 있음을 기뻐하고 더 좋아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 원망치 말고 애처롭기까지 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황지우- 나는 너다 503

나는 너다 503 황지우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낙타야, 모래 박힌 눈으로 동트는 지평선(地平線)을 보아라.바람에 떠밀려 새 날이 온다.일어나 또 가자.사막은 뱃 속에서 또 꾸르르거리는구나.지금 나에게는 칼도 경(經)도 없다.경(經)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길은, 가면 뒤에 있다.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그러나 너와 나는 구만리(九萬里) 청천(靑天)으로 걸어가고 있다.나는 너니까.우리는 자기(自己)야.우리 마음의 지도(地圖) 속의 별자리가 여기까지 오게 한 거야.

최하림- 가을, 그리고 겨울

가을, 그리고 겨울 최하림 깊은 가을길로 걸어갔다.피아노 소리 뒤엉킨예술학교 교정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고언덕과 집들어둠에 덮여이상하게 안개비 뿌렸다.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름다웠다.달리는 시간도 열렸다 닫히는 유리창도무성하게 돋아난 마른 잡초들은 마을과 더불어 있고시간을 통과해 온 얼굴들은 투명하고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사물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세석細石에 눈이 내렸다살아있으므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생각들이 무거워지고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소중한 것들은 언젠가 저렇듯 무겁게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등불이 사랑을 비출 것이다내가 울고 ..

고정희-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른 아침이면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불쑥불쑥 다가왔다가이내 허공 중에 흩어지는 너,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