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3470

김종길- 설날 아침에

설날 아침에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싹이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외눈박이 물고기처럼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고은- 눈길

눈길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지난 것이 다 덮여있는 눈길을.온 겨울을 떠돌고 와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눈 내리는 풍경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바라보노라 온갖 것의보이지 않는 움직임을.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안에서는 어둠이노라.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김남조- 겨울 바다

겨울 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미지(未知)의 새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매운 해풍에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허무의 물 불이랑 위에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기도의 문이 열리는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인고(忍苦)의 물이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