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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방(老莊)/장자 내편(莊子內篇)

장자이야기 내편(內篇) 2-12.제물론(齊物論):설결(齧缺)이 왕예(王倪)에게 물었다.(齧缺問乎王倪曰)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7. 7. 19.








장자(莊子)이야기 내편(內篇) 2-12.제물론(齊物論)

:설결(齧缺)이 왕예(王倪)에게 물었다.(齧缺問乎王倪曰)



(참고문헌: 1.『장자(莊子)』, 김달진 옮김, 문학동네

 2.『장자(莊子) 강의』, 전호근 옮김, 동녁 

3.『장자(莊子)』, 김학주 옮김, 연암서가)




설결(齧缺)이 왕예(王倪)에게 물었다.(齧缺問乎王倪曰)

"선생님은 만물이 다 같이 옳게 여기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子知物之所同是乎)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曰 吾惡乎知之)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모르신다는 것을 아십니까?"(子知子之所不知邪)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曰 吾惡乎知之)



"그렇다면 사물이란 본래 알 수 없는 것입니까?"(然則物無知邪)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曰 吾惡乎知之)

비록 그러하나 내 시험삼아 말해보겠네.(雖然 嘗試言之)

내가 안다고 말하는 것이 실은 모르는 것이 아닌줄 어찌 알겠는가?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

내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실은 아는 것이 아닌줄 어찌 알겠는가?

(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내가 또 시험삼아 자네에게 물어보겠네.(且吾嘗試問乎女)

사람이 습한 곳에서 자면(民溼寢)

 허릿병이 나고 반쪽이 마비가 되는데,(則腰疾偏死)

미꾸라지도 그러한가?(鰌然乎哉)

사람이 나무 위에 올라가면(木處)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는데(則惴慄恂懼)

원숭이도 그러한가?(猿猴然乎哉)

그러면 이 셋 중에서 누가 가장 올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가?(三者孰知正處)



사람은 소와 양, 개와 돼지고기를 먹고(民食芻豢)

고라니와 사슴은 풀을 뜯고(麋鹿食薦)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蝍且甘帶)

올빼미는 쥐를 좋아하네.(鴟鴉耆鼠 )

그러면 이 넷 중에서 누가 가장 올바른 맛을 알고 있는가?(四者孰知正味)



원숭이를 긴팔원숭이가 암컷으로 삼고(猿猵狙以爲雌)

고라니는 사슴과 교미하고(麋與鹿交)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어울려 논다네.(鰌與魚遊)

사람들은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를 예쁘다고 따르지만(毛嬙麗姬 人之所美也)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 속 깊이 들어가버리고(魚見之深入) 

새들은 그들을 보면 높이 날아가버리고(鳥見之高飛)

고라니와 사슴은 그들을 보면 힘껏 달아난다네.(麋鹿見之決驟)

그러면 이 넷 중에서 누가 가장 천하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가?(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



내가 보기에는(自我觀之) 

인의(仁義)의 실마리와 시비(是非)의 갈림길이 마구 뒤섞여 어지러우니,(仁義之端 是非之途 樊然殽亂)

내가 어찌 그것을 가려낼 수 있겠는가?"(吾惡能知其辯)




※왕예(王倪)는 요(堯)임금 때의 현인이며 은자였다.

설결(齧缺)은 왕예의 제자이며, 역시 현인이었고, 뒤에 허유(許由)의 스승이 된다.

여기서는 설결(齧缺)이 스승인 왕예(王倪)에게 '안다(知之)'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그런데 스승과 제자가 서로 말하는 입장이 다르다.


제자는 "선생님은 '만물이 다 같이 옳게 여기는 것(物之所同是)'을 알고 계십니까?"하고

현상세계 속에 있는 '절대적인 옳음(절대적인 是)'에 대해 묻고 있지만,

스승이 볼 때에 현상세계란 모든 것에 경계와 분별이 있는 상대적인 가치의 세계일 뿐이다.

즉, 현상세계에는 언제, 어디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가치, 절대적인 옳음이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의 '지(知)'에 대한 질문에

스승은 "모른다(吾惡乎知之)", 즉 '무지(無知)'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제자는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모르신다는 것(子之所不知)'을 아시는지요?"하고

 '무지(無知)'에 대해서 묻는다.

이번에도 스승은 "모른다(吾惡乎知之)", '무지(無知)'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자가 말하는 '모른다'와 스승이 말하는 '모른다'는 다른 것이다.

제자는 현상세계에서 '안다, 모른다' 고 할 때의 상대적인 '모른다(상대적인 無知)'를 말하고 있지만,

스승은 절대적인 道의 세계에 서서 '모른다(無知)'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道의 세계를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람의 감각과 인식능력의 한계가 상대적인 가치의 세계 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道의 세계는 언제나 '모른다(無知)의 세계'다.




그러나 여기서 제자는 물러서지 않고 한번 더 물어본다.

"그렇다면 '사물이란 본래부터 알 수가 없는 것(物無知)'입니까?"

즉, 사람이란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그런 존재냐고 묻는다.


여기서 장자(莊子)는 종종 '상대주의자(相對主義者)'라는 오해와 공격을 받기도 했다.


상대주의(相對主義)란 '모든 견해는 오로지 상대적인 가치만 지닌다'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사람이란 본래부터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는 존재가 되며,

사물이란 본래부터 알 수가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道라는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상대주의(相對主義)의 끝은 자멸이다.


그러나 장자(莊子)는 결코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장자에게 상대주의(相對主義)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道'라는 절대적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하나의 '임시방편'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자 스승이 제자에게 다시 묻는다.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정말로 아는 것일까?

사람이 무엇을 모른다고 할 때 그것이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내가 안다고 할 때 실은 모르는 것인줄 어찌 알겠는가?"(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

"내가 모른다고 할 때 실은 아는 것인줄 어찌 알겠는가?"(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그러면서 스승은 제자를 위해서 '비유'를 들어서...즉, '현상세계의 논리'를 가지고... 

설명해 준다.


"내가 시험삼아(嘗試言之) 말해보겠다."



※ 사람은 습기찬 곳에서 자면 허릿병이 나지만

미꾸라지에게는 안락한 잠자리가 된다.

사람은 나무꼭대기에 올라가면 두려워서 벌벌 떨어지지만

원숭이에게는 편안한 곳이다.


사람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고라니는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먹고, 올빼미는 쥐를 먹는다.


사람들은 여희(麗姬)를 미인이라고 칭송하고 한번 더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따라다니지만

물고기는 여희(麗姬)를 보면 물 속으로 숨고

새들은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고라니는 뛰어서 도망간다.



그러므로 사람이 말하는 가장 좋은 잠자리, 가장 맛있는 음식,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라는 게 정말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것일까? 

즉, '만물이 다 같이 옳게 여기는 것(物之所同是)'일까?


나아가 인간은 과연 그것을 알 수가 있을까?

'알 수가 없다(吾惡乎知之)', '모른다(無知)'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현상세계에서 사람들이 '안다, 모른다', '옳다, 그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모두 자신의 입장과 처지와 이해(利害)관계에 서서

 보고 말하는 '상대적인 것'이다.

즉, 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道의 세계에서 볼 때 그것은 '모른다(無知)'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인 왕예(王倪)는.. 즉 장자(莊子)는.. 말한다.


"사람들이 '이것이 인(仁)이다, 저것이 의(義)다' 라고 말하지만, 

그 인의(仁義)의 실마리와 시비(是非)의 갈림길이 마구 뒤섞여

마치 얽힌 실타래와 같으니, 어찌 그것을 가려낼 수 있겠는가?(吾惡能知其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