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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방(老莊)/장자 내편(莊子內篇)

장자이야기 내편(內篇) 2-8.제물론(齊物論):옛사람들은 그 지혜가 지극한 바가 있었으니..(古之人 其知有所至矣)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7. 5. 22.








장자(莊子)이야기 내편(內篇) 2-8.제물론(齊物論)

:옛사람들은 그 지혜가 지극한 바가 있었으니..(古之人 其知有所至矣)


(참고문헌: 1.『장자(莊子)』, 김달진 옮김, 문학동네

 2.『장자(莊子) 강의』, 전호근 옮김, 동녁 

3.『장자(莊子)』, 김학주 옮김, 연암서가)





옛사람들은 그 지혜가 지극한 바가 있었으니,(古之人 其知有所至矣)

어디까지 이르렀던가?(惡乎至)

'본래 사물이 없었다(爲未始有物者)'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있었는데(有以爲未始有物者)

지극하고 극진하여 더 보탤 것이 없다.(至矣 盡矣 不可以加矣)

그 다음은 '사물이 있지만(爲有物矣)'(其次以爲有物矣)

'본래 경계가 없다(未始有封也)'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而未始有封也)

그 다음은 '사물에 경계가 있지만(爲有封焉)'(其次以爲有封焉)

'본래 옳고 그름이 없다(未始有是非也)'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而未始有是非也)

'옳고 그름(是非)'이 밝아지면서 道가 무너졌다.(是非之彰也 道之所以虧也)

道가 무너지자 '사사로운 사랑(愛)'이 생겨났다.(道之所以虧 愛之所以成)



과연 이룸(成)과 무너짐(虧)이 있는 것일까?(果且有成與虧乎哉)

과연 이룸(成)과 무너짐(虧)이 없는 것일까?(果且無成與虧乎哉)

이룸(成)과 무너짐(虧)이 있는 것은(有成與虧)

옛날 소문(昭氏, 昭文)이 거문고를 타는 것이요,(故昭氏之鼓琴也)

이룸(成)과 무너짐(虧)이 없는 것은(無成與虧)

옛날 소문(昭氏, 昭文)이 거문고를 타지 않는 것이다.(故昭氏之不鼓琴也)



소문(昭文)은 거문고를 탔고,(昭文之鼓琴也)

사광(師曠)은 지팡이로 박자를 짚고,(師曠之枝策也)

혜자(惠子)는 오동나무 책상에 기대앉아 변론을 했다.(惠子之據梧也)

이 세 사람의 지혜는 거의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고(三子之知 幾乎皆其盛者也)

후세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다.(故載之末年)

다만 그 좋아하는 바가 옛 사람과 달라(唯其好之也 以異於彼)

그 좋아하는 바를 남에게 드러내고 싶어했다.(其好之也 欲以明之彼)

드러낼 수 없는 것(道)을 드러내려고 한 까닭에(非所明而明之)

'견백론(堅白論)' 같은 궤변의 어리석음으로 삶을 마치고,(故以堅白之昧終)

소문의 아들까지 아비의 거문고 줄 고르는 일로 삶을 마쳐서(而其子又以文之綸終)

종신토록 道를 이루지 못했다.(終身無成)

만약 이들이 '道를 이루었다(成)'고 한다면(若是而可謂成乎)

비록 나같은 사람도 道를 이루었다.(雖我亦成也)

만약 이들이 '道를 이루었다(成)'고 할 수 없다면(若是而不可謂成乎)

그들도 나도 道를 이룬 것이 없다.(物與我無成也)



그러므로 희미함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윽한 빛은(是故滑疑之耀)

聖人이 추구하는 것이다.(聖人之所圖也)

사사로운 분별을 버리고 

떳떳한 '자연의 道(庸,常)'에 맡기니,(爲是不用而寓諸庸)

이것을 '본래의 밝음(明)'으로 본다고 한다.(此之謂以明)




※ 여기서 '옛 사람(古之人)'은 옛날에 道를 깨달은 사람,

道의 세계에 가장 가까이 갔던.. 이상적인 인간이다.



그 지혜가 가장 지극했던 사람은

'본래 사물이 없었다(爲未始有物者)'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절대적인 무(無)의 세계'와 '혼돈(混沌)',

道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 다음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비록 사물이 있지만(爲有物矣)

거기에 너와 나(彼我), 이것과 저것(彼此)의 분별과 경계가 없는..

 어떤 절대적인 세계'를 알았다.(未始有封也)


그는 물아일체(物我一體), 우아일체(宇我一體)의 세계를 본 것이다.



다음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비록 사물에 분별과 경계가 있지만(爲有封焉)..

옳고 그름(是非)의 차별성이 없는.. 어떤 평등성의 세계'를 알았다.(未始有是非也)


여기까지는 보편적인 道의 세계다.




※ 그러나 훗날 보편적인 道의 세계가 무너지고(道之所以虧也)

상대적이고 당파적인 가치 판단의 세계로 굴러 떨어졌으니,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道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장자(莊子)는.. 옳고 그름의 시비(是非)가 밝게 드러나면서(是非之彰也)..

즉 누구나 옳고 그름(是非)을 가리고 드러내기를 좋아한 까닭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옳고 그름(是非)이란,

나와 너,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깨끗함과 더러움, 길고 짧음, 사랑과 미움 같은..

상대적이고 당파적인 가치판단의 세계를 말한다.  


이렇게 너와 나(彼我), 저것과 이것(彼此)의 차이와 차별성, 구별과 경계가 강조되자,

세계는 분열되고 계급이 생기고, 차별과 적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고대(古代)세계의..

 '道의 보편성(한세계), 하나됨(一, 大同), 평등성'은 무너져갔다.

 



※ 어떻게 道가 무너진 것을 알 수 있는가?


장자(莊子)는.. 어느 덧 '사사로운 사랑(愛)이 생겨났다(愛之所以成)'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애착(愛着), 편애(偏愛), 편견(偏見), 사리사욕(私利私欲)이

'보편적인 사랑(道德, 아가페)의 실천'을 방해하였고,

사(私)적인 것이 공(公)적인 영역을 침범했으니,

이것이 바로 '세상의 타락'이며, '도덕(道德)의 타락'이다.   




※ 여기서 이룸(成)과 무너짐(虧)이 있다는 것은(有成與虧)..


옛날에 소문(昭氏, 昭文)이 거문고를 탈때..

거문고 줄을 퉁겨서 나는 소리( 音)와 그 소리에 이어지는 묵음(默音),

그 묵음의 뒤를 잇는 소리(音), 이렇게 유(有)와 무(無)가 절묘하게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룸(成)과 무너짐(虧)이 없다는 것은(無成與虧)..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타지 않을 때..

거문고의 소리(音)와 묵음(默音)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소문(昭文)이 거문고 줄을 퉁김으로써..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 있던 음과 묵음을 세상에 드러냈다.


이토록 소문(昭文)은 뛰어난 거문고의 명인(名人)이었다.

그러나 소문(昭文)은 거문고를 탈 때 그만 분별심을 일으키고 말았다.



어떻게 분별심이 일어났는가?




※ 소문(昭文)은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이었다.

사광(師曠)은 장님 악사(樂士)이며 북을 잘 만들었다. 

그는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탈 때 옆에서 지팡이로 박자를 짚었다고 한다.

혜자(惠子)  역시 전국(戰國)시대의 유명한 논객이며, 정치가였다.


이 세 사람은 각각 거문고의 연주 기술, 북의 제작 기술, 논리학의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성취한 세계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발견한 道의 세계를.. 세상에 밝히고 설명하며 자랑하고 싶어했다.



이것은 분명 옛사람과 다른 것이니..

옛 사람은 그냥 좋아했을 뿐이나

이들 셋은 그 좋아하는 바를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했다.

사사로운 사랑(愛), 사사로운 욕심이 발동한 것이다.




※ 道의 세계는.. 어떤 전문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학문과 논리의 세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흔히 도인(道人)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라고 말한다.



또한 道의 세계는 말로써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로써 밝히려고 한다면(非所明而明之)

 장자(莊子)가 보기에..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하여 결국 혜자(惠子)는 궤변을 주장하다 일생을 마치고,

소문(昭文)의 자식도 단지 아버지의 연주 기술을 잇는데 그쳤을 뿐이니..

그들은 참된 道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終身無成)




'골의지요(滑疑之耀)'는.. 밖으로는 흐릿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 빛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골()은 홀(惚)과 같다.

'있는 듯 한데 없는 것'이다.


의(疑)는 '가만히 머물러 흩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노자(老子)의 '화기광 동기진(和其光 同其塵)'과 같은 의미다.


道의 '찬란한 빛(明道)을 부드럽게 감추어.. 

티끌 세상(俗世)과 하나로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으로 빛을 감추고 겉으로 흐릿함이..

 聖人이 추구하는 道의 세계다.


그러므로 聖人은 '道의 세계'를 사사로이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聖人은 사사로운 분별, 사사로운 사랑을 버린다.

다만 떳떳한 '자연의 道(庸,常)'에 맡길 뿐이다.(爲是不用而寓諸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