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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방(老莊)/장자 내편(莊子內篇)

장자이야기 내편(內篇) 2-6.제물론(齊物論):손가락으로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은(以指喩指之非指)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7. 4. 30.








장자(莊子)이야기 내편(內篇) 2-6.제물론(齊物論)

:손가락으로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은(以指喩指之非指)


(참고문헌: 1.『장자(莊子)』, 김달진 옮김, 문학동네

 2.『장자(莊子) 강의』, 전호근 옮김, 동녁 

3.『장자(莊子)』, 김학주 옮김, 연암서가)





손가락(指)으로 손가락(指)이 손가락이 아니라고(非指) 가르치는 것은(以指喩指之非指)

손가락이 아닌 것(非指)으로 손가락(指)이 손가락이 아니라고(非指)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말(馬)을 가지고 말(馬)이 말이 아니라고(非馬) 가르치는 것은(以馬喩馬之非馬)

말이 아닌 것(非馬)을 가지고 말(馬)이 말이 아니라고(非馬)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천지(天地)는 한 개의 손가락(指)이요,(天地一指也)

만물(萬物)은 한 마리의 말(馬)이다.(萬物一馬也)



옳다(可)고 하니까 옳은(可) 것이고(可乎可)

옳지 않다(不可)고 하니까 옳지 않은(不可) 것이다.(不可乎不可)

길(道)은 사람이 걸어서 생긴 것이요,(道行之而成)

사물은 사람이 그렇게 부르다 보니 이름이 생긴 것이다.(物謂之而然)

어째서 그러한가?(惡乎然)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이다.(然於然)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惡乎不然)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다.(不然於不然)



사물은 본래 그러한 바(然)가 있고, 본래 옳은 바(可)가 있으니,(物固有所然 物固有所可)

그렇지 않은(不然) 사물이 없고, 옳지 않은(不可) 사물이 없다.(無物不然 無物不可)

그러므로 풀줄기와 큰 기둥,(固爲是擧莛與楹)

문둥이와 서시(西施)를 비교하면(厲與西施)

그 모습이 기이하고 괴상야릇해 보이겠지만(恢恑譎怪)

道로 꿰꿇으면 하나(一)가 된다.(道通爲一)



나누어짐(分)은 이루어짐(成)이요,(其分也 成也)

이루어짐(成)은 무너짐(毁)이다.(其成也 毁也)

모든 사물은 이루어짐(成)도 무너짐(毁)도 없으며(凡物無成與毁)

다시 통(通)하여 하나(一)가 된다.(復通爲一)

오직 道에 통달한 사람만이 '통(通)하여 하나(一)되는 이치'를 알아서(唯達者知通爲一)

사사로운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爲是不用)

떳떳한 '자연의 도(庸, 常)'에 맡겨둔다.(而寓諸庸)

'자연의 道(庸, 常)'는 '작용(用)'이요,(庸也者 用也)

작용(用)은 '통함(通)'이요,(用也者 通也)

통함(通)은 '터득함(得)'이니,(通也者 得也)

알맞게 터득(得)의 경지에 이르면 거의 道에 가깝다.(適得而幾矣)

그저 자연에 맡길 뿐이며,(因是已)

이미 그러고도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道라고 한다.(已而不知其然 謂之道)





※손가락(指)은 손가락(指)이기도 하고 손가락이 아니기도(非指) 하다.

내게는 손가락이지만, 그 손가락으로 작은 벌레를 눌러 죽인다면

벌레에게 내 손가락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敵)이며, 살상(殺傷) 무기가 된다.

그러나 내가 손가락(指)을 보고 무기(武器)라고 부른다면

사람들은 언뜻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말(馬)은 말(馬)이지만 말이 아니기도(非馬) 하다.

여기 죽은 말의 시체가 있다. 그것은 한 때 푸른 초원을 달리던 아름다운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쓰러져 있는 것은 말(馬)인가, 말이 아닌가(非馬)?


그런데 말의 시체가 썩어 좋은 거름이 되고 거기서 신선한 풀이 자라났다.

어린 망아지가 와서 그 풀을 뜯어 먹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말의 시체인가? 풀인가? 망아지인가?

내가 죽은 말의 시체를 보고 그것을 토끼풀이라고 부른다면

사람들은 언뜻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것일까?



천지(天地)와 만물(萬物)도 이와 같아서..


장자(莊子)는.. 

 "천지(天地)는 한 개의 손가락이며(天地一指也),

만물(萬物)은 한 마리의 말"이라고 말한다..(萬物一馬也)


즉,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은 천지와 만물이기도 하고,

천지와 만물이 아니기도 하다.


 영원한, 무한한 시간의 변화 속에서.. 

한 때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無)였다.

 

본래 무(無)였으며,

언젠가는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元始複本)



만약 내가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을 무(無)라고 부른다면,

나는 참말을 하는 것일까,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참말이기도 하고, 거짓말이기도 할까?

아니면 그것은 참말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닌 것일까?




※ 길(道)은 처음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과 짐승이 우연히 걸어다니기 시작하면서

길(道)이 나는 것이다.


 사람이 자꾸 걸어서 길(道)이 생기듯이(道行之而成)..

 사람이 자꾸 그렇게 불러서 사물의 이름(名)이 붙여진 것이다.(物謂之而然)


처음에 누군가 우연히 손가락을 손가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오랜 세월 반복해서 부르다 보니, 손가락의 이름(名)이 손가락이 된 것이다.


만약 처음에 누군가 우연히 손가락을 도토리라고 부르거나

히루룽이라고 불렀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손가락의 이름(名)은 도토리나 히루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그 시작은 아주 우연히 일어난 것이다.

처음부터 그것을 꼭 그렇게 불러야만 하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름(名)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 속한다.



 ※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관습이나 사회적 통념, 편견이 형성되는 과정도 그러하다.


본래 맨 처음에는 옳고(可), 옳지 않은 것(不可)이 없었다.

본래 자연(自然) 에는 옳고(可), 옳지 않은 것(不可)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옳다고 하니까 옳은 것이 되었다.(可乎可)

이것이 '옳다, 좋다, good'는 사회적 관습과 통념이 생겨난 이유다.


사람이 옳지 않다고 하니까 옳지 않은 것이 되었다.(不可乎不可)

이것이 '옳지 않다, 혹은 나쁘다, bad'는 사회적 관습과 통념이 생겨난 이유다.



'똥은 더럽다.'

그런데 똥이 본래 더러운 것은 아니다.

똥은 자연(自然)에 속해있다.

자연(自然)의 道에는 '깨끗하다, 더럽다'는 것이 없다.

자연의 道는 다만 '그러할 뿐(庸, 常)'이다.

그런데 사람이 더럽다고 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 된다.

그러나 농부에게 잘 숙성된 똥은 좋은 거름이 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또한 구더기에게 똥은 아늑한 잠자리이며, 낙원의 음식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옳다, 옳지 않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아름답다, 추하다, 쓸모 있다, 쓸모 없다'고 말하는 모든 가치 평가의 기준은

결코 자연적(自然的)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사람의 제한된 '인식 경험' 속에서..

그러니까 사람의 '인식능력의 한계' 속에서.. 

인위적(人爲的)으로 형성된,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가치 평가의 기준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린 풀줄기와 단단한 기둥은 

'약하다, 강하다'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서로가 너무 다르지만,

절대적인 道의 자리에서 보면 그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둘 다 본래 무(無)에서 나왔으며, 언젠가 다시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

道의 자리에서 볼 때, 그 둘은 하나(一)다.

 


마찬가지로, 전국시대 오(吳)나라의 미인 서시(西施)와 나병환자를

그 외모가 '아름답다, 혹은 추하다'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비교해 본다면

그 둘은 너무나 달라서, 

오히려 기이하고 괴상야릇하게 느껴질 정도이지만(恢恑譎怪)..


절대적인 道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그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둘 다 본래 무(無)에서 나왔으며,

언젠가 다시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道의 자리에 서서 본다면..


문둥이는 서시(西施)의 아름다움을 질투하지 않을 것이며,

서시(西施)는 문둥이의 고름과 상처를 역겨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道로 꿰꿇으면 만물이 하나(一)가 된다.(道通爲一)


오직 道의 자리에 설 때에

만물의 '참된 평등함(齊物)'을 깨닫게 된다.


'제물(齊物)',

 즉 '만물이 가지런히, 조화로이 하나(一)로 되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러므로 다만 道에 통달한 사람만이(唯達者), 깨달은 사람만이..

만물이 '통(通)하여 하나(一)가 되는 이치 (通爲一)'를 알 수 있다.


그럴 때 그는 사사로운 시시비비(是是非非)에 빠지지 않고(爲是不用)

모든 것을 '자연의 道(庸, 常)'에 맡긴다.(而寓諸庸)



 '자연의 道(庸, 常)'는 

인간 중심의  '쓸모있다, 혹은 쓸모없다'는 상대적인 가치를 뛰어넘는 것이다.



오히려 '자연의 道(庸, 常)'는 

 '근원적인 쓸모(用)'이기 때문에(庸也者 用也)..

언제 어디서나, 무엇에나 두루 통(通)한다.(用也者 通也)


통(通)하여.. 알맞게 '터득함(得)'하면(通也者 得也)

거의 道에 가깝다.(適得而幾矣)



그러므로 道에 통달한 사람은(唯達者)

다만 자연의 道에 맡길 뿐(因是已)..

이미 그러고도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道라고 한다.(已而不知其然 謂之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