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이야기 내편(內篇) 2-5.제물론(齊物論)
:모든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이것 아닌 것이 없다.(物無非彼 物無非是)
(참고문헌: 1.『장자(莊子)』, 김달진 옮김, 문학동네
2.『장자(莊子) 강의』, 전호근 옮김, 동녁
3.『장자(莊子)』, 김학주 옮김, 연암서가)
제물론(齊物論)이란?
'제물(齊物)'은 장자(莊子)가 천지만물(天地萬物)을 바라보는 시선이니,
'만물을 가지런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은 차별없는 평등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에만 드러나는 '만물의 참 모습(齊物)'이다.
오직 무심(無心)과 무아(無我)의 경지에 설 때..
천지만물과 내가 가지런히 평등함을 알며,
생사(生死)를 초월할 수 있다.
세상의 온갖 어지러운 시비(是非)들을 '본래의 밝음(明, 天)'에 비춰서 보며,
자연(自然, 道)에 맡긴다.
그럴 때에 천지만물과 모든 시비가 절로 조화롭게, 가지런하게 '하나(一, 道)'가 된다.
그것이 '제물(齊物)'이다.
모든 사물은 저것(彼)이 아닌 것이 없고 (物無非彼)
이것(是)이 아닌 것이 없다.(物無非是)
저것(彼)은 저것(彼)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自彼則不見)
이것(是)을 알면 곧 저것(彼)을 알 수 있다.(自知則知之)
그래서 말하기를, "저것(彼)은 이것(是)에서 나오고,(故曰 彼出於是)
이것(是)은 또한 저것(彼)에서 나온다"고 한다.(是亦因彼)
저것(彼)과 이것(是)이 서로를 생겨나게 한다는 주장이다.(彼是方生之說也)
그에 따르면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雖然 方生方死)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다.(方死方生)
옳음이 있으면 옳지 않음이 있고 (方可方不可)
옳지 않음이 있으면 옳음이 있다.(方不可方可)
옳음은 그래서 옳다가 그래서 그르게 되고 (因是因非)
그래서 그르다가 그래서 옳게 된다.(因非因是)
그러므로 聖人은 상대적인 시비(是非)의 기준을 따르지 않고 (是以聖人不由)
하늘(天)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而照之于天)
또한 이에 따르면 (亦因是也)
이것(是)은 곧 저것(彼)이요, (是亦彼也)
저것(彼)은 곧 이것(是)이다.(彼亦是也)
저것(彼)도 하나의 옳음과 그름(是非)이 되고(彼亦一是非)
이것(是)도 하나의 옳음과 그름(是非)이 된다.(此亦一是非矣)
그렇다면 과연 저것(彼)과 이것(是)이 따로 있는 것인가?(果此有彼是乎哉)
아니면 저것(彼)과 이것(是)이 따로 없는 것인가?(果此無彼是乎哉)
저것(彼)과 이것(是)이라는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한 것,(彼是莫得其偶)
그것을 '道의 지도리(道樞, 도추)'라고 말한다.(謂之道樞)
道의 지도리(道樞)가 둥근 고리의 가장 알맞은 중심(中)을 차지하면 (樞是得其環中)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以應無窮)
옳음도 무궁한 변화의 하나요,(是亦一無窮)
그름도 무궁한 변화의 하나일 뿐이다.(非亦一無窮)
그러므로 '본래의 밝음(明)'에 비추어 보는 것만 못하다.(故曰 莫若以明)
※ 우리가 어떤 사물을 가리킬 때 '이것(是)' 또는 '저것(彼)'이라고 말한다.
'이것(是)' 또는 '저것(彼)'은 어떤 사물의 고유한 성격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사물을 가리키는 '지시어'일 뿐이다.
보통 내게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은 '이것(是)'이 되고,
'이것(是)'보다 먼 거리에 있는 것은 '저것(彼)'이 된다.
그렇게 볼 때, 나의 입장에서는 이것(是)이 이것(是)이고, 저것(彼)이 저것(彼)이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이것(是)이 저것(彼)이 되고, 저것(彼)이 이것(是)이 된다.
그 '보는 입장(立場)'에 따라서, '관점(觀點)'에 따라서
모든 사물은 '이것(是)'이 아닌 것이 없고, '저것(彼)'이 아닌 것이 없다.
'이것(是)'은 '이것(是)'이면서 동시에 '저것(彼)'이며,
'저것(彼)'은 '저것(彼)'이면서 동시에 '이것(是)'이다.
'이것(是)'과 '저것(彼)'은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궁(無窮)한 변화 속에서
'이것(是)'이 되기도 하고 '저것(彼)'이 되기도 한다.
즉 '이것(是)'과 '저것(彼)'은 굳어져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是)'과 '저것(彼)'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一時的)이며, 상대적(相對的)인 것이다.
※ '이것(是)'에서 '저것(彼)'이 나오고, '저것(彼)'에서 '이것(是)'이 나온다.
'이것(是)'과 '저것(彼)'이 서로를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
바로 '피시방생설彼是方生之說'이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다.
우리가 삶이라고 인식하는 '무엇'이 없다면,
우리는 삶이 아닌 것, 죽음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이라는 기준으로 죽음을 본다.
그 때 비로소 죽음이 나타난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무엇'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삶에 대해서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기준으로 삶을 본다.
그 때 비로소 삶이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삶과 죽음을 느끼고, 생사(生死)에 매이게 된다.
삶은 좋은 것이 되고, 죽음은 나쁜 것이 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정말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고,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일시적이며 상대적으로 드러나는
'자연(自然)의 생명(生命)현상'의 '이것(是)'과 '저것(彼)'이 아닐까?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삶과 죽음을 대할 때에,
삶의 입장에서도 보지 않고, 죽음의 입장에서도 보지 않는다.
오직 '이것(是)'과 '저것'이라는 상대적인 시비를 떠나서
'하늘(天)의 자리'에서 본다.
'道의 자리'에서 본다.
장자(莊子)는 이것을 다른 말로... '본래의 밝음(明)'에 비추어 본다고 말한다.
그럴 때 비로소 삶과 죽음이 본래 '하나(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장자(莊子)는 이 '하늘(天)의 자리', '본래의 밝음(明)'을..
'道의 지도리(道樞, 도추)'에 비유했다.
※본래 '지도리'란 문(門)을 열고 닫기 위해서..
문틀의 위 아래에 구멍을 뚫고
문짝의 한쪽 끝에는 위 아래로 상투처럼 튀어나오게 만들어서
그것을 문틀의 구멍에 꽂아 '여닫이 문(門)'을 고정시키는 장치다.
'돌쩌귀' 역시 구멍이 있는 암짝은 문설주에 박고
수짝은 문에 박아서 서로를 맞추어 꽂게 되어 있는.. 여닫이 문(門)의 '지도리'다.
맷돌은 가운데 있는 구멍에 맷돌의 축을 꽂아서 돌리게 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지도리'라고 한다.
즉, '지도리'의 역할은.. 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움직임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또한 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움직임에 무궁(無窮)하게 호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리'는 '중심(中), 중(中)의 자리'를 말한다.
그것은 이것(是)과 저것(彼)이라는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한 자리이며,
'하늘(天)의 자리', '道의 자리(道樞, 도추)'다.
만약 '지도리'가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
문짝(門)은 문틀에서 떨어져나가 버릴 것이고,
맷돌은 한쪽으로 쏠리면서 곡식을 고르게 갈아내지 못할 것이다.
즉, 道의 무궁(無窮)한 움직임에 더 이상 호응하지 못하고
일찍 끝나게 된다. 망하게 된다.(不道早已)
그러므로 道를 아는 사람은 항상 '중(中)의 자리',
바로 '道의 지도리(道樞, 도추)'를 지킨다.
그리고 '본래의 밝음(明)'에 비추어 본다.
한편 뇌교육에서는 '道의 지도리(道樞, 도추)'를
'0점의 자리', 조화점, 관찰자 의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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