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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방(老莊)/장자 내편(莊子內篇)

장자이야기 내편(內篇) 2-7.제물론(齊物論):신명(神明)을 수고롭게 하며 억지로 하나(一)로 만들려고 하지만(勞神明爲一)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7. 5. 6.








장자(莊子)이야기 내편(內篇) 2-7.제물론(齊物論)

:신명(神明)을 수고롭게 하며 억지로 하나(一)로 만들려고 하지만(勞神明爲一)


(참고문헌: 1.『장자(莊子)』, 김달진 옮김, 문학동네

 2.『장자(莊子) 강의』, 전호근 옮김, 동녁 

3.『장자(莊子)』, 김학주 옮김, 연암서가)




신명(神明)을 수고롭게 하며 억지로 하나(一)로 만들려고 하지만(勞神明爲一)

그것이 본래 '같은 것(同)'임을 알지 못하는 것을(而不知其同也)

 '조삼(朝三)'이라고 한다.(謂之朝三)



무엇을 '조삼(朝三)'이라고 하는가?(何謂朝三)

원숭이를 기르던 어떤 영감(狙公)이

도토리를 나눠 주면서 말했다.(狙公賦芧曰)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 (朝三而暮四)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衆狙皆怒)

다시 주인이 "그러면 아침에는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자,(曰 然則朝四而暮四)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衆狙皆悅)

명분(名)도 실질(實)도 달라진 게 없는데(名實未 虧)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낸 것은(而喜怒爲用)

이 때문이다.(亦因是也)


그러나 聖人은 시비(是非)를 조화(和)시켜(是以聖人和之以是非)

'하늘의 저울(天鈞)'에 맡기고 편안히 쉰다.(而休乎天鈞)

이것을 '양행(兩行)'이라고 한다.(시지위양행)





장자(莊子)가 볼 때..


신명(神明)을 수고롭게 하며 억지로 '하나(一, 道)'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그저 道를 '이해(理解, 知解)한 사람'이다.


그는 지식과 배움을 습득하고 

道(一)를 분석하고 이해하면서

 道를 알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것은 헛수고가 되기 쉽다.


왜냐하면 깨달음(道)은 지식(知解)이 아니기 때문이다.

道를 깨달은 것과 道를 이해한 것은 다르다.



그러므로 억지로 신명(神明)을 수고롭게 할 필요는 없다.



그저 道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본래 천지와 만물이 '하나(一, 道, 同)'임을,

'하나의 뿌리(道, 同根, 無)' 에서 나온 것임을 알면.. 그 뿐이다.


'참된 평등성(平等, 中, 無涯, 齊物)'을 아는 것, 

그리고 무욕(無欲)한 것,

그 이상의 道는 없다.



그럴 때 비로소 道(一, 中)의 자리에 서서..

 

전체와 부분을 함께 보게 된다. 

나무와 숲을 함께 보게 된다.

이마와 뒤통수를 함께 보게 된다.



장자(莊子)는 여기서.. 전체와 부분을 함께 보지 못하는 것을

 '조삼(朝三)'이라고 하고,

전체와 부분을 함께 보는 것을 '양행(兩行)'이라고 했다.


'양행(兩行)'은 道의 눈(眼目)이다.




※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는 영감(狙公)이 있었는데,

그 먹이로 도토리를 주었다.

원래는 '아침에 네 개, 저녁에 네 개'를 주었는데,

어느 해 도토리의 수확량이 줄어서 먹이의 양도 줄이게 되었다.


그래서 영감은 원숭이들에게 새롭게 제안을 한 것이다.

이제부터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朝三而暮四)'고 말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었다.

영감은 원숭이들을 달래려고  

다시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朝四而暮四)'고 하였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것이다.


하루에 받는 도토리의 양은 여덟 개에서 일곱 개로 줄었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받든(朝三而暮四)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받든(朝四而暮四),

하루에 받는 도토리의 양은 모두 일곱 개로 같지만, 

원숭이들은 당장 아침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도 기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원숭이들은 전체와 부분을 함께 보지 못하고,

다만 부분만을 보는 존재다.


그래서 마구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옳고 그름(是非)을 따지며 성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喜怒爲用)




 그러나 聖人은 道의 자리에 서서.. 전체와 부분을 함께 보기 때문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시비(是非)를 조화(和)시켜

'하늘의 저울(天鈞, 자연의 균형)'에 맡긴다.


그리고 마음을 편안히 쉰다.(而休乎天鈞)



여기서 '하늘의 저울(天鈞)'은 

앞에 나오는 '道의 지도리(道樞)'와 같다.



'하늘의 저울(天鈞)'은 옳고 그름(是非)이 서로 통하는 자리다.

이것을 '양행(兩行)'이라고 한다.



결국 영감과 원숭이들이 모두 만족했으니,

'양행(兩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