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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방(釋家)/육조단경(六祖壇經)

돈황본(敦煌本) 『육조단경(六祖壇經)』지침4. 무념위종(無念爲宗, 무념으로 종을 삼는다)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9. 3. 16.







돈황본(敦煌本) 『육조단경(六祖壇經)』

지침4. 무념위종(無念爲宗, 무념으로 종을 삼는다)

참고도서 - 퇴옹 성철(退翁 性徹) 지음




○ 나의 법문(法門)은 옛부터

모두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고, (皆立無念爲宗)

모양 없음(無相)으로 몸(體)을 삼고 (無相爲體)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本)을 삼느니라. (無住爲本)



☞육조의 '무념(無念)'은 망상이 다 없어진

 '불지무념(佛地無念)', 부처님 지위의 무념이다. 




○ 그러므로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느니라. (是以 立無念爲宗)

이 가르침의 문(敎門)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느니라. (此敎門 立無念爲宗)

이 법문(法門)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느니라. (此法門 立無念爲宗)



☞ 육조의 근본 입장은 '묘각무념(妙覺無念)'이다.




○ 세상 사람이 견해를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만약 유념(有念)이 없으면 무념(無念) 또한 서지 못하느니라. (若無有念 無念亦不立)

'없다(無)'하는 것은 무슨 일이 없다는 것이요, (無者 無何事)

'생각하다(念)'는 것은 무슨 사물을 생각하는 것이다. (念者 念何物)

'없다(無)'는 것은 (無者)

서로 상대되는 두 모양(二相)의 모든 번뇌(塵勞)를 버리는 것이다. (離二相諸塵勞)



진여(眞如)는 생각의 몸(體)이며, (眞如 念之體)

생각(念)은 진여의 쓰임새(用)다. (念是眞如之用)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性起念 雖卽見聞覺知)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하나니, (不染萬境 而常自在)

『유마경(維摩經)』에 이르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지만 (外能善分別諸相)

안으로 첫째 뜻(제일의)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內於第一義而不動)



☞'무념(無念)'은 유무(有無)나 선악(善惡)같은

상대되는 두 모양의 번뇌를 영원히 여읜 '진여정념(眞如正念)'을 말한다. 




○ 이 법을 깨치면 곧 무념(無念)이니, (悟此法者 卽是無念)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無憶無着)


광망(誑妄)을 일으키지 않는다. (莫起誑妄)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이니라. (卽自是眞如性)

지혜로 밝게 비추어 보아 (用智慧觀照)

모든 법을 버리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나니, (於一切法 不取不捨)


이것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의 도를 이루는 것이다. (卽是見性成佛道)




○ 무념(無念)이란 모든 법을 보되 (無念法者 見一切法)

모든 법에 물들거나 매달리지 않으며, (不著一切法)

모든 곳에 두루 하되 모든 곳에 끄달리지 않으니라. (遍一切處 不著一切處)



☞ "만약 모든 법을 보되, 마음이 물들어 끄달리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無念)이다."




○ 모든 경계 위에서 물들지 않는 것을 무념(무념)이라 이름 하느니라.

(어일체경상 불염 명위무념)



☞"일만 가지 경계(萬境)를 만나서도 마음이 늘 고요하여(常寂)

생각이 모든 경계를 떠나고 (머무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경계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無慾) 무념(無念)이니라."




○ 무념법을 깨치면 모든 법에 두루 통달하고, (悟無念法者 萬法 盡通)

무념법을 깨치면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무념법을 깨치면 부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悟無念法者 至佛地位)



☞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아서 모든 망념이 사라졌으니, 견성성불(見性成佛)이요,

깨달은 뒤에는 부처님 행을 수행한다. (修行佛行)

돈법(頓法), 당장 성불해서 마친다. (直了成佛)"


그러므로 '돈오견성(頓悟見性)해서 차제점수(次第漸修)', 차례로 차츰 차츰 닦아나가는 '점수(漸修)사상'은 

교가(敎家)의 전통이며, 육조의 사상을 바로 전한 것이 아닌 지해(知解)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