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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방(老莊)/장자 내편(莊子內篇)

장자이야기 내편(內篇) 6-8.대종사(大宗師):남백자규(南伯子葵)가 여우(女偊)에게 물었다. (南伯子葵問乎女偊曰)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8. 7. 9.










장자(莊子)이야기 내편(內篇) 6-8.대종사(大宗師)

:남백자규(南伯子葵)가 여우(女偊)에게 물었다. (南伯子葵問乎女偊曰)



(참고문헌: 1.『장자(莊子)』, 김달진 옮김, 문학동네

 2.『장자(莊子) 강의』, 전호근 옮김, 동녁 

3.『장자(莊子)』, 김학주 옮김, 연암서가

4.『장자산책』, 이아무개, 삼인)




남백자규(南伯子葵)가 여우(女偊)에게 물었다. (南伯子葵問乎女偊 曰)

"선생은 나이가 많은데도 (子之年長矣)

얼굴빛이 어린애 같으니 어찌 된 까닭입니까?" (而色若孺子 何也)


여우(女偊)가 대답했다.(曰)

"나는 道를 들었기 때문이오."(吾聞道矣)


남백자규(子葵)가 물었다.(南伯子葵 曰)

"道는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까?"(道可得學也)


여우(女偊)가 대답했다.(曰)

"아아, 어찌 가능하겠소?(惡 惡可)

선생은 道를 배울 사람이 못되오.(子非其人也)

저 '복량의(卜梁倚)'는 聖人의 재질을 지녔지만 (夫卜梁倚有聖人之才)

聖人의 道는 갖지 못했고, (而無聖人之道)

나는 聖人의 道를 가졌지만 (我有聖人之道)

聖人의 재질은 지니지 못했소.(而無聖人之才)

내가 그를 가르치고 싶었는데 (吾欲以敎之)

과연 그가 聖人이 될지는 의심스러웠소. (庶幾其果爲聖人乎)

그렇다 하더라도 聖人의 道를 (不然以聖人之道)

聖人이 될 재목에게 전하는 것은 쉬우리라 생각하고 (告聖人之才亦易矣)

나는 지키고 앉아 그에게 道를 전했소. (吾猶告以守之)

사흘이 지나자 그는 천하를 벗어났소.(參日而後 能外天下)

이미 천하를 벗어난지라 (已外天下矣)

내가 다시 지키고 앉아 전했더니(吾又守之)

칠일이 지나자 그는 사물을 떠났소. (七日而後 能外物)

이미 사물을 떠났으므로 내가 다시 지키고 앉아 전했더니 (已外物矣 吾又守之)

구일이 지나자 그는 삶을 내려놓았소. (九日而後 能外生)

삶을 내려놓은 뒤에 (已外生矣)

그는 모든 것을 밝게 꿰뚫어 보았고 (而後能朝徹)

밝게 꿰뚫어 본 뒤에는 (朝徹而後)

'하나의 道(一, 獨)'를 볼 수 있게 되었소.( 能見獨)

모든 것이 '하나(一, 獨)'인 것을 알게 된 뒤에는 (見獨而後)

시간(古今)의 굴레를 벗어낫소. (能無古今)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자 (無古今而後)

그는 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는 경지에 들어갔소. (能入於不死不生)

삶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고 (殺生者不死)

삶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합니다. (生生者不生)

(聖人의 道는) 만물을 보내지 않는 것이 없고 (其爲物 無不將也)

맞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고 (無不迎也)

헐어버리지 않는 것이 없고 (無不毁也)

이루지 않는 것이 없소.(無不成也)

그것을 '영녕(攖寧)'이라 하는데, (其名爲攖寧)

영녕(攖寧)이란 '혼돈 뒤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라오."

(攖寧也者 攖而後成者也)



자규(子葵)가 말했다.(南伯子葵 曰)

"선생은 어디서 그 道를 들었습니까?"(子獨惡乎聞之)



여우(女偊)가 대답했다.(曰)

"부묵(副墨)의 아들에게 들었소.(聞諸副墨之子)

그런데 부묵(副墨)의 아들은 낙송(洛誦)의 손자에게 들었고, (副墨之子聞諸洛誦之孫)

낙송(洛誦)의 손자는 첨명(瞻明)에게 들었고, (洛誦之孫聞之瞻明)

첨명(瞻明)은 섭허(聶許)에게 들었고, (瞻明문之聶許)

섭허(聶許)는 수역(需役)에게 들었고, (聶許聞之需役)

수역需役은 오구(於謳)에게 들었고, (需役聞之於謳)

오구(於謳)는 현명(玄冥)에게 들었고, (於謳聞之玄冥)

현명(玄冥)은 참료(參廖)에게 들었고, (玄冥聞之參廖)

참료(參廖)는 의시(疑始)에게서 들었소."(參廖聞之疑始)




※여기서 '여우(女偶)'는 道를 닦은 어진 사람이며, 장자(莊子)가 만든 가공의 인물이다.

'복량의(卜梁倚)'는  복량(卜梁)이 성이고, 의(倚)가 이름인 상고시대의 현인(賢人)이다.



남백자규(南伯子葵)가 자신도 '道를 배울 수 있는가'하고 묻자, 

여우(女偶)는 '당신은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고 대답한다.



(아마도, 남백자규(南伯子葵)는 무척 실망했을 것이다.

실망한 그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여우(女偶)는 자신과 자신의 제자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 해 준다.) 



여우(女偶)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道를 들어서 알고 있지만, (聖人의 道를 가졌지만)

聖人이 되기에는 재질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의 말은 결코 겸손함이 아니다.


그는 '道를 들은 사람'이기에.. 지금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聖人이 될 재질을 지닌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여우(女偶)는 자신의 제자인 '복량의(卜梁倚)'에 대해 얘기해 준다.



道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이다.

정성껏 닦으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밝아져서

마침내 道와 통하게 된다. 



그런데 닦는 것은 욕심껏 닦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욕심과 이기심을 비워내고... 마침내 그 끝에 가서는

'나(我)'를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마침내 '무아(無我)'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은 저마다 재질이 다르고, 차이가 나게 된다.




   

여우(女偶)는 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복량의(卜梁倚)에게서 聖人의 재질을 발견하고, 그에게 道를 전했다.



여기서 '道를 터득하는 단계별 수행의 과정'이 나온다.(入道과정)


①먼저 '외천하(外天下)', 세상과 세상 일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②'외물(外物)', 사람과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다.


③'외생(外生)', 생사를 초월하는것이다.

 

④'조철(朝徹)', 긴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이 빛나듯, 

만물을 밝게 꿰뚫어 보는 것이다. (통찰력과 예지력이 생긴다.)


⑤'견독(見獨)', 스스로 홀로 존재하는(獨) 영원한 생명,

 '하나(一)의 道'를 깨닫는 것이다.


⑥'무고금(無古今)', 사람의 의식이 빚어낸 시간과 공간의 개념,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⑦'입어불사불생(入於不死不生)',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사라지자, 

'나'라는 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고, 

더 이상 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는 경지, 바로 '영생(永生)'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


 


※ 과연 복량의(卜梁倚)는 매우 뛰어났다. 그는 道를 받은지 3일 만에 세상사를 잊었고, 

7일 만에 사람과 사물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내려놓았으며,

9일 만에 생사를 초월했다.



남백자규(南伯子葵)와 여우(女偶)가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복량의(卜梁倚)는 가능했을까?  



여우(女偶)가 분명하게 답을  말해준다.


" 삶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고, 삶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대사일번득도(大死一番得道)'다.


'크게 한번 죽으면(大死一番)

道를 얻는다, 道를 이룬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죽어야 하는가?

에고가 죽어야 한다. '참된 무아(無我)'가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평생에 걸쳐 수행해도 그 에고가 죽지를 않는데,  

어떤 사람은 단 9일 만에 에고를 내려놓고, 참된 무아가 되니...


과연 여우(女偶)의 말대로 聖人의 재목은 따로 있는 것일까?



그래도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비록 여우(女偶)가 聖人이 되지는 못했으나, 

자기가 들은 道를 전하여,

聖人의 재질을 가진 제자를 마침내 '聖人이 되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수행자들, 구도자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이다..!



여우(女偶)는 '지키고 앉아서, 道를 전했다.'

그는 성심성의껏 聖人의 道를 전한 것이다.


 


※'영()'은 어지럽히는 것, 혼란스러운 것이며,

'녕()'은 안정되게 하는 것이니,

 

'큰 혼란 뒤에 안정이 이루어지는 것(攖寧)'을 말한다.



득도(得道)의 과정에서..

수행자는 큰 혼란의 과정을 겪으며, 마침내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고,

또한 큰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보낸다.


마침내 오는 편안함과 안정과 깨달음이 있으니, 



역시 '대사일번득도(大死一番得道)'와 같은 뜻이라고 보겠다.

'크게 한번 죽으면, 道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장자(莊子)는 '道의 전수 과정'을 소개한다.

여우(女偶)는 이 과정을 통해서 '道를 들은 것'이다.



ⓛ'부묵(副墨)'은 '道를 기록한 문자'이니,

道에 관한 책이나 글을 의인화한 것이다.


②'낙송(洛誦)'은 '道를 말로 표현하는 것'이니,

경구(經句)를 줄줄이 외우고 암송하는 것, 토론하는 것을 의인화한 것이다.


③'첨명(瞻明)'은 '눈이 열려 밝게 보는 것'이니,

글과 말을 통해서 계속해서 道를 듣고 접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를 보는 눈이 밝아지는 것을 의인화한 것이다.


④'섭허(聶許)'는 '소곤소곤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 것'이니,

스승의 말을 듣고 또 듣다 보면 귀가 밝아지는 것을 의인화한 것이다. 

 

⑤'수역(需役)'은 '실행에 옮겨 터득하는 것'이니,

삶 속에서 道를 실천하는 것, 道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인화한 것이다.


⑥'어구(於謳)'는 '감탄하고 노래하는 것'이니,

마침내 道를 깨닫고 찬탄하는 오도송(悟道頌)을 부르는 것을 의인화한 것이다.


⑦'현명(玄冥)'은 '깊고 어둡고 그윽한 것'이니,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道의 모습을 의인화한 것이다.


⑧'참요(參廖)'는 '고요하고 적막한 것'이니,

텅 비어 있어 고요한 道의 모습이며, 말을 잊는 것을 의인화한 것이다.


⑨'의시(疑始)'는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이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道를 의인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