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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방(老莊)/장자 내편(莊子內篇)

장자이야기 내편(內篇) 2-16.제물론(齊物論):자네와 내가 논쟁을 한다고 가정해보세.(旣使我與若辯矣)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7. 8. 13.








장자(莊子)이야기 내편(內篇) 2-16.제물론(齊物論)

:자네와 내가 논쟁을 한다고 가정해보세.(旣使我與若辯矣)



(참고문헌: 1.『장자(莊子)』, 김달진 옮김, 문학동네

 2.『장자(莊子) 강의』, 전호근 옮김, 동녁 

3.『장자(莊子)』, 김학주 옮김, 연암서가)




(장오자長梧者가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와 내가 논쟁을 한다고 가정해보세.(旣使我與若辯矣) 

자네가 내게 이기고 내가 자네에게 진다면(若勝我 我不若勝)

자네는 옳고 나는 그른 것일까?(若果是也 我果非也邪)

내가 자네에게 이기고 자네가 내게 진다면(我勝若 若不吾勝)

나는 옳고 자네는 그른 것일까?(我果是也 而果非也邪)

 누군가는 옳고 누군가는 그른 것일까?(其或是也 其或非也邪)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일까?(其俱是也 其俱非也邪)

나와 자네가 그것을 알 수 없다면(我與若不能相知也)

사람이란 본래 어둡고 흐리멍덩한 것(黮闇)을 받아서 태어난 것인가.(則人固受其黮闇)

나는 누구를 시켜 바로잡게(正之) 할 것인가.(吾誰使正之)



만약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바로잡도록 한다면(使同乎若者正之)

이미 자네와 의견이 같은데(旣與若同矣)

어찌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惡能正之)

만약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바로잡도록 한다면(使同乎我者正之)

이미 나와 의견이 같은데(旣同乎我矣)

어찌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惡能正之)

만약 나와 자네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바로잡도록 한다면(使異乎我與若者正之)

이미 나와 자네와 의견이 다른데(旣異乎我與若矣)

어찌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惡能正之)

만약 나와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바로잡도록 한다면(使同乎我與若者正之)

이미 나와 자네와 의견이 같은데(旣同乎我與若矣)

어찌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惡能正之)

그렇다면 나와 자네와 다른 사람이 모두 알 수가 없다.(然則我與若 與人 俱不能相知也)

그런데도 바로잡아 줄 또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하는가.(而待彼也邪)

'변하는 소리(化聲)'에 의지하는 것은(化聲之相待)

의지하지 않는 것과 같다네.(若其不相待)

'천예(天倪)'에 조화시키고(和之以天倪)

'만연(曼衍)'에 맡겨두는 것만이(因之以曼衍)

'천수(窮年)'를 다하는 방법이라네."(所以窮年也)



(구작자瞿鵲子가 다시 묻기를...)

"'천예(天倪)에 조화시킨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요?"(何謂和之以天倪)



(장오자長梧者가 대답하기를...)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曰 是不是)

그러한 것이 그렇지 않은 것이기도 하네.(然不然)

만약 옳은 것이 정말 옳기만 하다면(是若果是也)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굳이 따질 것도 없겠지. (則是之異乎不是也 亦無辯)

만약 그러한 것이 정말 그런 것이기만 하다면(然若果然也)

그러한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굳이 따질 것도 없을게야.

(則然之異乎不然也 亦無辯)

나이를 잊고 의리를 잊고(忘年忘義)

'경계가 없는 경지(無竟)'에서 노닐며,(振於無竟)

'경계가 없는 경지'에 나 자신을 맡긴다네."(故寓諸無竟)"




※ 서로 의견이 다른 두 사람이 '논쟁(辯, 변론)'을 할 때,

논쟁(辯, 변론)에서 이긴 사람이 정말 옳은 것(是)일까?

이긴 사람이 반드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논쟁(辯, 변론)에서 진 사람은 정말 틀린 것(非)일까?

진 사람은 반드시 진리에서 벗어난 것일까?



논쟁(辯)이란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辯)'이다.

논쟁(辯)이란 '무엇이 논리적으로 오류인가'를 찾아내어 지적하는 것일 뿐, 

 '진리(眞理)'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논쟁(辯)에서 진 사람은 대개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는다.

 말(言)로 하는 '논리 싸움'에서 혹은 '명분의 다툼'에서 이긴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상대방이 '변론술'에 능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기 쉽다. 


 

따라서 논쟁(辯), 말(言)을 통해서는 진리를 가릴 수도 없고,

이 세상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끝낼 수도 없다. 




※ '화성(化聲, 변하는 소리)'는 사람의 '말(言)'을 가리킨다.

 사람의 '말(言)'이란..

 개인의 감정이나 욕망, 이해관계에 따라서 계속해서 바뀌는 '변하는 소리(化聲)'다. 

또한 어떤 이론이나 편견, 가치관, 사상에 의해서 왜곡되고 오염되어 '변하는 소리(化聲)'다.



장자(莊子)는 이렇게 시시때때로 변덕을 부리는 인간의 말(言)에 의지해서(相待)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변하는 소리(化聲)'에 의지하는 것은(化聲之相待)

처음부터 의지하지 않는 것과 같기(若其不相待)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란 본래 '어둡고 흐리멍덩한 것(黮闇)'하게 태어나서 

끝끝내 진리를,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알 수 없는 존재인가?


장자(莊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를 시켜서, 무엇에 의지해서(待彼)' 

시시비비를 가리고 바로잡을 것인가(正之)?




'천예(天倪)'는 저 하늘의 끝,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이니,

바로 '경계가 없는 곳(無竟)'이며, 道를 말한다.


'만연(曼衍)'은 '끝없이 길고 무한히 넓게 펼쳐지는 것'이니,

역시 '경계가 없이 하나(一)로 이어지는 것'이며, 道를 말한다.



장자(莊子)는 정말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바로 잡고 싶다면(正之)

자신을 '천예(天倪)'에 조화(和)시키고, '만연(曼衍)'에 맡겨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시시비비(是是非非)란 것은

'상대적(相對的)인 것'이어서,

그 사람이 처한 입장에 따라서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옳지 않은 것이 옳은 것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법정에서 다투는 것을 생각해 보라.

하나의 사건을 두고 원고측의 입장과 피고측의 입장이 그토록 다르지 않은가.


따라서 '상대적인 옳다, 그르다'를 따질 것이 없다.(無辯)

비록 따진다 해도 그것으로는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끝낼 수가 없다.



또한 만약 옳은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즉, 그것이 진리(眞理)라면 

옳지 않은 것과는 너무나 분명하게 다르기 때문에 

역시 옳다, 그르다를 따질 것이 없다. (無辯)


왜냐하면 진리(眞理)는 인간의 시비(是非) 다툼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따질 것이 없는 것이다. (無辯)




'천예(天倪)와 '만연(曼衍)은

 '무경(無竟, 경계가 없다)'이며, '무애(無涯, 끝이 없다)'이니,

그 곳에는 나이(年, 시간)도 없으며,

세속의 의리(義, 시시비비)도 없으며, 그 어떤 경계나 차별심도 없다.


그것은 앞서 나오는 '道의 지도리(道樞, 中)'와 같고,

'하늘의 저울(天鈞, 中)'과 같다. 



그것에 자신을 맡기는 것만이.. 道처럼..

 '하늘로부터 받은 수명을 다하는 방법(窮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