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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방/詩,노래하는 웅녀

이학성- 여우를 살리기 위해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7. 2. 10.








여우를 살리기 위해



이학성




여우를 살리기 위하여 혹시

사람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없겠지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살아남기 위하여

아홉 마리 여우를 잡아야 하는 일은 없었나

그건 여우의 증오를 위하여 참 안 된 일이야



빗장을 꼭꼭 걸어 잠그고

가만히 들어봐, 여우의 울음소리를

냉랭한 산의 짙은 나무숲을 가르며 저녁

마을 아래까지 내려오는 흉흉스런 울음소리를



때때로 그 소리는

배고파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애타게 제 짝을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슨

잘못을 싹싹 비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느 땐 세상

어느 구석을 향하여 크게 비웃는 소리 같기도 하던데



깊은 밤중에 여우가 울면

누군가 한 사람이 꼭 눕는다지

외가 쪽으로 먼 사람이 쓰러진 날도 그 밤에

뒷산 골짜기에서 소름 끼치게 여우가 울었다는 거야



아직껏 밤늦도록 세상 공부를 하다

종종 큰방으로 귀 기울이기도 하는데

식구들 제각기 잠자는 숨소리가 귀에 들려오곤 하면

쉽사리 그 소리가 좋아 오래도록 책이 잘 읽히지



깊은 산 속 여우를 살리기 위해

내가 이것저것 책을 읽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커다란 도회지 변두리로 집을 옮겨 와

짐승 울음 따위는 전혀 들을 수조차 없게 되었지만



해가 서서히 기울어 가는 어느 날

두 조카아이 손목을 잡고 뒷산 숲길을 거닐다가 

마냥 즐거이 조잘거리는 아이들에게

슬픈 여우의 전설을 조금만 이야기해 주리라



그리고 누군가 외롭게 밤새워 공부를 하는 

    세상의 아직도 말 못할 누누한 일들을

아직은 이해 못하는 그것들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보며

이윽고 숲길을 되짚어 천천히 내려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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