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를 살리기 위해
이학성
여우를 살리기 위하여 혹시
사람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없겠지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살아남기 위하여
아홉 마리 여우를 잡아야 하는 일은 없었나
그건 여우의 증오를 위하여 참 안 된 일이야
빗장을 꼭꼭 걸어 잠그고
가만히 들어봐, 여우의 울음소리를
냉랭한 산의 짙은 나무숲을 가르며 저녁
마을 아래까지 내려오는 흉흉스런 울음소리를
때때로 그 소리는
배고파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애타게 제 짝을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슨
잘못을 싹싹 비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느 땐 세상
어느 구석을 향하여 크게 비웃는 소리 같기도 하던데
깊은 밤중에 여우가 울면
누군가 한 사람이 꼭 눕는다지
외가 쪽으로 먼 사람이 쓰러진 날도 그 밤에
뒷산 골짜기에서 소름 끼치게 여우가 울었다는 거야
아직껏 밤늦도록 세상 공부를 하다
종종 큰방으로 귀 기울이기도 하는데
식구들 제각기 잠자는 숨소리가 귀에 들려오곤 하면
쉽사리 그 소리가 좋아 오래도록 책이 잘 읽히지
깊은 산 속 여우를 살리기 위해
내가 이것저것 책을 읽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커다란 도회지 변두리로 집을 옮겨 와
짐승 울음 따위는 전혀 들을 수조차 없게 되었지만
해가 서서히 기울어 가는 어느 날
두 조카아이 손목을 잡고 뒷산 숲길을 거닐다가
마냥 즐거이 조잘거리는 아이들에게
슬픈 여우의 전설을 조금만 이야기해 주리라
그리고 누군가 외롭게 밤새워 공부를 하는
세상의 아직도 말 못할 누누한 일들을
아직은 이해 못하는 그것들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보며
이윽고 숲길을 되짚어 천천히 내려오리라
'바람의 방 > 詩,노래하는 웅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윤학- 제비집 (0) | 2017.02.17 |
---|---|
김남주- 사랑은 (0) | 2017.02.15 |
박용래- 저녁눈 (0) | 2017.02.08 |
장석주-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0) | 2017.02.03 |
조정권- 산정묘지(山頂墓地)1 (0) | 2017.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