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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방(老莊)/장자 내편(莊子內篇)

장자이야기 내편(內篇) 1-8.소요유(逍遙遊): 우리 집에 아주 큰 나무가 있는데(吾有大樹)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7. 2. 13.








장자(莊子)이야기 내편(內篇) 1-8.소요유(逍遙遊)

: 우리 집에 아주 큰 나무가 있는데(吾有大樹)




(참고문헌: 1.『장자(莊子)』, 김달진 옮김, 문학동네

 2.『장자(莊子) 강의』, 전호근 옮김, 동녁 

3.『장자(莊子)』, 김학주 옮김, 연암서가)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 아주 큰 나무가 있는데(吾有大樹)

사람들이 가죽나무라고 부르오.(人謂之樗)

큰 줄기는 옹이가 많아서 먹줄을 칠 수가 없고(其大本擁腫而不中繩墨)

잔 가지는 뒤틀리고 굽어서 그림쇠나 곱자를 댈 수가 없소.(其小枝券曲而不中規矩)

그래서 길 가에 서 있는데도(立之塗)

목수들이 돌아보지도 않소.(匠者不顧)



지금 장자(莊子) 선생의 말은(今子之言)

이 나무처럼 크기만 했지 아무 쓸모가 없소.(大而無用)

그래서 사람들이 듣지 않고 다 떠나버리는 것이오.(衆所同去也)"




장자(莊子)가 대답했다.


"선생은 언젠가 살쾡이(狸鼪)를 보았을 것입니다.

몸을 땅에 바짝 엎드려 있다가 놀러나온 작은 먹이를 노리지만,

동쪽 서쪽 아무 데나 날뛰고

높은 곳 낮은 곳을 가리지 않고 덤비다가

결국 덫에 걸리거나 그물에 잡혀서 죽고 말지요.



그런데 저 검은 들소(犛牛)는

크기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지만,

크기만 할 뿐 쥐 한 마리를 잡지 못하지요.



지금 선생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今子有大樹) 

쓸모가 없다고(無用) 걱정하십니다.(患其無用)



선생은 어째서 그 나무를 '무하유(無何有)의 고을'(何不樹之於無何有之鄕)

광막한 들판에 심어놓고(廣莫之野)

하는 일 없이 유유히 그 옆을 거닐면서(彷徨乎無爲其側) 

편안히 그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지 못합니까?(逍遙乎寢臥其下) 



그 나무는 도끼에 찍힐 염려도 없고(不夭斤斧)

아무도 와서 해치지 않을 것이니,(無物害者)

쓸모없다는 것(無所可用)이 어찌 괴로운 일이기만 하겠습니까?(無所可用 安所困若哉)"





※ 장자(莊子, B.C.370~B.C.280)는

전국시대 말기(戰國時代 B.C.481~B.C.221)의 사람으로..

맹자(孟子, B.C.372~ B.C.289)와 같은 시대, 비슷한 연배였다.


장자(莊子)의 이름은 주(周)이며, 자는 자휴(子休)이며,

몽(蒙, 송나라 땅, 지금의 하남성 상구 북쪽) 사람으로..

칠원(漆園, 국가 소유의 동산과 정원)의 관리자였다.


장자(莊子)의 학설은 '노자(老子)'를 근본으로 하였고,

'완전한 자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경지'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노자(老子)보다 더 적극적이었으며, 

노자(老子)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발전시켰다.


장자(莊子)에 의해서 '도가(道家)철학'은 더욱 체계화 되었다.




※ 『장자(莊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았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말기의 사회'를 알아야 한다.


그 당시에는 힘없는 많은 백성이 전쟁에 끌려나가 죽고,

부역에 끌려나가 죽고,

배고파 굶어죽고, 헐벗어 얼어죽는.. 그야말로 난세(亂世)였다.

또한 철저한 '봉건농노제(封建農奴制)'의 사회였다.  


『장자(莊子)』는 이런 비참한 '전쟁의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쓰여졌다.



『장자(莊子)』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은둔(隱遁), 양생(養生),

문명(文明)의 부정, 완전한 자유(自由)의 추구는..

그런 힘없는 백성의 마지막 저항이자, 하나의 탈출구, 생존방식이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장자(莊子)를.. '시대의 반항아, 혁명가'라고 불렀다.




※ 혜시(惠施, 惠子)는 자기에게 아주 큰 나무가 있는데,

온통 옹이투성이고, 울퉁불퉁하게 굽어서 목재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목수들조차 그 나무를 거들떠보지 않는단다.


여기서 큰 나무(大樹)는.. 세상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장자(莊子) 선생의 말도 이처럼 크고 거창하기만 할 뿐,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는 쓸모없다고 여기며, 

다들 떠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혜시(惠施)는.. '합종책'을 주장하고 실천했던 당대의 '현실참여적인 정치가'답게 

장자(莊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을 비판한다.       




※ 그런데 장자(莊子)의 생각은 다르다.


'살쾡이(狸鼪)'는 눈 앞의 작은 먹이를 노리며 이리 저리 마구 날뛰지만,

결국엔 자신보다 더 강하고, 더 큰 이익을 노리는, 더 탐욕스러운 사람들에게 잡혀서

부질없이 죽고 만다.



그런데 '검은 소(犛牛)'는 너무 커서..

그런 강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지만,

쥐를 잡지도 못한다.


검은 소(犛牛)는 남을 해치지도 않고, 남에게 해를 받지도 않으면서..

평화롭게 들판의 풀을 뜯는다.


그렇게 무위(無爲)한 삶을 산다.



알타이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 중간지대에 산다고 하는 이 '검은 소(犛牛)'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만물의 어머니, 신령한 암컷'인 '현빈(玄牝)'을 떠올리게 한다.


"골짜기의 신령함은 죽지 않으니(谷神不死),

이를 '검은 소(玄牝, 신령한 암컷)'라고 말한다.(是謂玄牝)"



물론, 여기서 '검은 소(犛牛)'는  道의 다른 상징적인 표현이다.  


' 道(大)는 쓸모가 없다.(大而無用)

(그러나) 쓸모없는 것이 참으로 큰 쓸모가 된다.(無用而大用)'



장자(莊子)에 의하면.. 道는 바로 '양생(養生)'에 큰 쓸모가 있다.

즉 '삶을 기르는(養生)'데 큰 쓸모가 있다.



장자(莊子)의 시대에.. 전쟁의 시대에.. 힘없는 백성에게..

 '양생(養生)', 즉 '삶을 유지하고 기르는 것' 만큼이나 

 더 절실하고 더 큰 쓸모라는 게 과연 또 있겠는가?




※ '무하유의 고을(無何有之鄕)은'...

 

① 말 그대로 '그 어느 곳에도 없는 고을'이라는 뜻이니,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장자의 '이상향(理想鄕)'이다.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utopia)』도

  '없다(ou)' + '땅, 장소(toppos)'의 합성어이니,

 역시 '존재하지 않는 곳, 존재하지 않는 땅'이라는 뜻이 된다.



② '무하유의 고을(無何有之鄕)', 그 곳에는 삶을 해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無物害者)

그러므로 그 곳은 '양생(養生)'이 가능한 땅이다.



장자(莊子)는 그 곳에 큰 나무를 옮겨심고


'하는 일 없이 유유히 그 옆을 거닐면서(彷徨乎無爲其側) 

편안히 그 그늘에 누워 낮잠이나 자는 것이 좋다(逍遙乎寢臥其下)'고 권한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도끼에 찍힐 염려도 없고(不夭斤斧)

아무도 와서 해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無物害者)'..


그러면서, '쓸모없다'는 것이 어찌 괴로운 일이기만 하겠는가?(無所可用 安所困若哉)'라고..

혜시(惠施)에게 되묻는다.




※ '양생(養生)'의 관점에서 볼 때에...


정치가인 혜시(惠施), 당신의 삶은 저 '살쾡이처럼'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당신이 어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내세우던 간에

끝없는 전쟁과 약육강식의 논리 속에서..

성공하면 남을 죽이고, 실패하면 내가 죽어야 하는.. 그런 폭력적인 삶은..

결국엔 저 자신도 죽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생(養生)의 길'이 아니다.



혜시(惠施)여, 차라리 저 '검은 소(犛牛)'와 '큰 나무(大樹)'처럼..

  무위(無爲)하게, 무용(無用)하게 사는 것이 더 낫다.




※ 그런데 여기서 장자(莊子)는 '방황(彷徨)'을 아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방황(彷徨)은 일정한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되고, 또 아무 데나 가도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목적에서조차 '자유로운 상태'이니,

아무 목적의식이 없는 상태이며,


장자에게.. 그것은 '무위(無爲)의 조건'이 된다.



실제로 온 천하가 전쟁을 하고,

자고 나면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미친 세상에서..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들, 쓸모가 많은 유용(有用)한 사람들이 가는 곳은..

  바로 조정(朝廷, 권력기구)이며, '전쟁터'였다.


전쟁이란 '유위(有爲, 人爲)의 극치(極致)'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이 전쟁터에서 죽었다.

자신이 왜 죽는지 모르면서 죽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누구의 전쟁'인가?



그러므로 장자(莊子)가 볼 때는.. 차라리 방황(彷徨)을 하는 것이 더 낫다!

차라리 방황(彷徨)을 하라!



자(莊子)는.. 그런 미친 세상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의미'를 담아서..

 

차라리 저 광막한 들판에서.. 큰 나무(大樹) 아래서..

'방황(彷徨)하며.. 노닐고(逍遙)..

아무 하는 일 없이(無爲).. 편안히 낮잠이나 자야겠다(寢臥)'고 말한다.

 


이것이 장자(莊子)가 가진.. 길들여지지 않는..

 '시대의 반항아'의 모습이기도 하다.






'소요유(逍遙遊)'란..

'마음이 절대적인 자유(自由)의 경지에서 노니는 것(遊)'이다.


이 절대적인 자유는.. 대소(大小), 장단(長短), 무용(無用)과 유용(有用)의 경지를 초월한..

즉 상대적인 가치 판단의 세계를 초월한..'초월적 행복의 상태'이다.


이것은 오직 '영혼의 각성과 변화(깨달음)'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무하유(無何有)의 세계'이니, 

불가(佛家)의 '무소유(無所有)' 혹은 유가(儒家)의 '낙천안명(樂天安命)'의 경지와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