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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방/詩,노래하는 웅녀

서정주- 자화상(自畵像)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7. 1. 30.








자화상(自畵像)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