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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방/詩,노래하는 웅녀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제일 예뻤을 때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6. 8. 17.








내가 제일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

유정 옮김

 

    

 

내가 제일 예뻤을 때

거리들은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난데없는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게 보이곤 했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누구도 정다운 선물을 바쳐주지는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엔 알지 못했고

서늘한 눈길만을 남기고 죄다 떠나버렸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딱딱했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우리나라는 전쟁에 졌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활보했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넘쳤다

금연을 깨뜨렸을 때처럼 어찔거리며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했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나는 너무나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될 수만 있다면 오래 살기로

나이 먹고 지독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영감님처럼 말이지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항복했다..

전쟁 중의.. 그리고 패전 후의 일본에서.. 일본 여성들 역시 상처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