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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방(老莊)/장자 내편(莊子內篇)

장자이야기 내편(內篇) 5-1.덕충부(德充符):노(魯)나라에 왕태(王駘)라는 올자(兀者)가 있었는데...(魯有兀者王駘)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8. 3. 5.










장자(莊子)이야기 내편(內篇) 5-1.덕충부(德充符):

노(魯)나라에 왕태(王駘)라는 올자(兀者)가 있었는데...(魯有兀者王駘)




(참고문헌: 1.『장자(莊子)』, 김달진 옮김, 문학동네

 2.『장자(莊子) 강의』, 전호근 옮김, 동녁 

3.『장자(莊子)』, 김학주 옮김, 연암서가

4.『장자』, 이기동, 동인서원)




 


'덕충부(德充符)'란?



내면의 德이 충일(充溢)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흘러 넘쳐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때, 내면의 '德'과 겉으로 드러나는 '징표, 징험()'이

마치 '신표(信標,符)를 맞추는 것'처럼 서로 꼭 들어맞게 된다.(德充之)

   


德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형체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 마음이 '自然(道, 德, 天)'에 노닐기 때문에

세속(世俗)의 인정(人情)에 더러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안으로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에 빠지지 않고

밖으로는 옳고 그름의 시비에 휩쓸리지 않게 된다.



덕충부(德充符)에서.. 장자(莊子)는 왕태(王駘), 애태타(哀駘它) 같은 

절름발이, 곱추, 추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일부러 등장시키고

그들의 내면 속 '충만한 德'을 드러낸다.


그렇게 해서 겉모습과 현상에 쉽게 의존하고 현혹되는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판한다.




노(魯)나라에 왕태(王駘)라는 올자(兀者)가 있었는데(魯有兀者王駘)

그를 따르는 제자의 수가 공자(孔子)의 제자만큼 되었다.


상계(常季)가 공자(仲尼)에게 물었다.

"왕태(王駘)는 형벌을 받아 발꿈치가 잘린 절름발이인데도(王駘兀者也)

그를 따르며 배우려는 사람의 수가(從之遊者) 

선생님과 더불어 노(魯)나라를 양분할 정도입니다.(與夫子中分魯)

그는 서 있을 뿐 가르치지도 않고(立不敎)

앉아 있을 뿐 토론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坐不議)

그런데도 텅 비어서 갔던 사람들이 가득 차서 돌아옵니다.(虛而往 實而歸)

진실로 말없는 가르침이 있어서(固有不言之敎)

형체없이 마음으로 느껴 깨닫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無形而心成者耶)

그는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是何人耶)



공자(仲尼)가 대답했다.

"선생은 聖人이시다.(夫子聖人也)

나도 진작 찾아가 뵙고자 했으나 아직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丘也直後而未往耳)

나는 장차 그 분을 스승으로 모시려 하는데,(丘將以爲師)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말할 게 있겠느냐?(而況不若丘者乎)

어찌 노(魯)나라 뿐이겠느냐?(奚假魯國)

나는 장차 천하 사람들을 이끌고 그 분을 따를 작정이다."(丘將引天下而與從之)



상계(常季)가 말했다.

"그는 올자(兀者)인데도 선생님보다 훌륭하다고 하시니,(彼兀者也 而王先生)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분이겠습니다.(其與庸亦遠矣)

그런 사람의 마음씀씀이는 대체 어떠합니까?"(若然者 其用心也 獨若之何)



공자(仲尼)가 대답했다.

"죽고 사는 것이 큰 일이지만(死生亦大矣)

그것이 그 분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네.(而不得與之變)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雖天地覆墜)

그것이 그 분을 무너지게 하지 못하네.(亦將不與之遺)

(만물을) 거짓없이 꿰뚫어 알기에(審乎無假)

(그 분은) 사물을 따라 옮겨다니지 않는다네.(而不與物遷)

(다만) 만물을 감화시키고(命物之化) 

 '본래의 모습(宗, 道)'을 지킬 뿐이라네."(而守其宗也)



상계(常季)가 다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何謂也)



공자(仲尼)가 대답했다.

"서로 다른 것을 보기로 한다면(自其異者視之) 

간과 쓸개가 초(楚)나라와 월(越)나라 만큼 멀고,(肝膽楚越也)

서로 같은 것을 보기로 한다면(自其同者視之) 

만물이 모두 하나(一)인 것이야.(萬物皆一也)

무릇 그런 분은(夫若然者) 

귀와 눈이 좋아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且不知耳目之所宜) 

그의 마음은 德의 조화로운 세계에서 노닌다네.(而遊心乎德之化)

만물이 하나(一)인 것을 보고(物視其所一) 

그 잃는 것을 따지지 않으니,(而不見其所喪)

비록 발 하나를 잃었어도(視喪其足) 

마치 흙덩이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여길 뿐이라네.(猶遺土也)"






※ 이 이야기는 장자(莊子)의 창작물이다.

 

장자(莊子)는 공자(仲尼)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여기서 '왕태(王駘)'와 '상계(常季)' 는 모두 가공의 인물이다.


왕태(王駘)는 절름발이, 장애자, 올자(兀者)인데,

'올자(兀者)'란 죄를 짓고 그 형벌로 복숭아뼈 아래 발뒷꿈치가 잘린 사람이다.

그래서 걸을 때면 눈에 띄게 절름거린다.


그러니까 왕태(王駘)는 불구자에다 죄인(罪人)이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면 남들의 '선생'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왕태(王駘)는 '훌륭한 스승(王先生)'이며,

그를 따르는 제자의 수가 그 시대에 공자의 제자들만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공자(仲尼)까지도 왕태(王駘)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장자(莊子)의 이야기다...)




※ 그러면 왕태(王駘)는 어떤 스승인가?


그는 앉으나 서나, 언제나,

아무 것도 가르치는 게 없는 스승이다.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데도...

사람들은 텅 비고 공허한 마음을 갖고 그를 찾아가서 

가슴 가득 충만함을, 뿌듯함을 느끼고 돌아온다.


공자의 제자인 상계(常季)는 그게 정말 이상했다.


말없이 가르치고(不言之敎)...

겉으로 가르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깨닫게 하는...

그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 주는..(無形而心成者耶)

그런 스승이 정말로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상계(常季)는 공자에게.. 왕태(王駘)가 어떤 사람이며,

그의 '마음쓰는 법(用心)', 즉 그의 德은 어떤 것이냐고 묻게 된다.




※ 과연 왕태(王駘)는 어떤 경지에 있으며,

그의 '덕충지부(悳充之符)', 그 德이 드러나는 모습은 어떠한가?


 그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에 개의치 않는다.

죽음도 삶도 그를 바꿔놓을 수 없다.

그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월한 사람이다. 


하늘과 땅이 무너진다 해도 그는 동요하지 않는다.


어떤 환경의 변화와 어려움도

그를, 그의 德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물의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거짓없이' 꿰뚫어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審乎無假)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사물(事物)을 좇아 이리 저리 끌려다니지 않는다.(而不與物遷)

그는 중심이 선 사람이다.(守中) 



 그는 말없이.. 형체없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만물을 감화시키지만(命物之化), 

자신이 누군가를 감화시킨다는 생각이 없다.


그에게는 만물이 하나이기 때문에...

감화를 시키는 사람도, 즉 가르치는 사람도..

감화를 받는 대상도, 즉 가르침을 받는 사람도 거기에 없다.


그는 다만 '근본 자리, 道의 뿌리(宗)'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다.(守其宗) 

혹은 앉아 있을 뿐이다.




※왕태(王駘)는 깨달은 사람이고, 만물을 한 가지(一)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우리가 만약 '다른 점'을 찾고자 하고..

작은 차이점을 분별하여 부각시키면..

 내 몸 속의 간과 쓸개조차

앙숙인 초나라와 월나라 사이처럼.. 멀고 다른 것이다.


그러나 '같은 점'을 찾고자 하면..

공통점과 일치점을 찾고자 하면..

간과 쓸개가 모두 내 몸의 일부이며, 한 몸인 것이다.


결국은 '보는 관점, 보는 자리'의 문제다.


 

※ 자연은, 道는, 만물(萬物)은 하나이며, 한 뿌리다.


자연(自然)의 입장에서 보면.. 간이나 쓸개나,

발이나 흙덩어리나, 새나 물고기나, 아무 차이가 없는 그저 자연일 뿐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은 발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그 잃은 것을, 그 잃은 후의 차이점을 의식하지 않는다. 

슬퍼하지 않는다.


그는 '눈과 귀(감각기관)'가 보고 듣고 분별하고 의식하는 모든 것들,

'아름답다, 추하다', '같다, 다르다'고 느끼는 그 모든 것들을 의식하지 않는다.

끄달리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연의 일부가 역시 자연인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

더 큰 자연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여길 뿐이다.   


마치 내 옷에 묻은 흙덩어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