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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방(老莊)(공개)/장자 내편(莊子內篇)

장자이야기 내편(內篇) 1-7.소요유(逍遙遊): 위(魏)나라 왕이 내게 큰 박씨를 주었는데(魏王貽我大瓠之種)

by 하늘꽃별나무바람 2017. 2. 6.








장자(莊子)이야기 내편(內篇) 1-7.소요유(逍遙遊)

: 위()나라 왕이 내게 큰 박씨를 주었는데(魏王貽我大瓠之種)




(참고문헌: 1.『장자(莊子)』, 김달진 옮김, 문학동네

 2.『장자(莊子) 강의』, 전호근 옮김, 동녁 

3.『장자(莊子)』, 김학주 옮김, 연암서가)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말했다.


"위(魏)나라 임금이 내게 큰 박씨(瓠之種)를 보내 주었소.

내가 그것을 땅에 심었더니

다섯 섬(五石)들이 큰 박(瓠)이 열렸소.

속을 파내고 물이나 간장을 담았더니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소.

두 짝으로 쪼개서 바가지(瓢)를 만들었더니

넓고 평평해서 도무지 담을 것이 없었소.(瓠落無所用)

텅 비어 크기만 했지(非不呺然大也) 

쓸모가 없어서(無用) 나는 그것을 깨뜨려 버렸소.(吾爲其無用而掊之)"



장자(莊子)가 대답했다.


"선생은 정말로 큰 것(大)을 쓰는데 서투른 사람이군요.(夫子固拙於用大矣)

송(宋)나라 사람 중에 손 트지 않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宋人有善爲不龜手之藥者)

그 기술로 집안 대대로 솜빨래 하는 일을 하며 살았지요.(世世以洴澼絖爲事)

하루는 나그네가 소문을 듣고 와선(客聞之)

백금(百金)을 주고 그 기술을 사겠다고 했지요.(請買其方百金)

 송(宋)나라 사람은 가족을 모아놓고 의논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솜을 빨았지만 겨우 푼 돈을 버는 정도였다.

오늘 하루 아침에 이 기술을 백금(百金)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에게 약방문을 내주자."



나그네는 비방을 사서 오(吳)나라 임금에게 가서 유세했지요.(客得之 以說吳王)

월(越)나라가 쳐들어오자(越有難)

오(吳)나라 임금은 나그네를 장수로 삼았고(吳王使之將)

겨울에 월(越나라 군사를 맞아 수전(水戰)을 벌여 크게 이겼습니다.(冬與越人水戰 大敗越人)

오(吳)나라 임금은 나그네에게 땅을 떼주고 제후로 봉했지요.(裂地而封之)



손 트지 않는 비방은 하나인데(能不龜手一也)

어떤 사람은 제후가 되고(或以封)

어떤 사람은 평생 솜빨래 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或不免於洴澼絖)

그것은 그 쓰는 방법(所用)이 달랐기 때문입니다.(則所用之異也)



지금 선생에게 다섯 섬들이 큰 박이 있다면(今子有五石之瓠)

어째서 그것으로 큰 배(大樽)를 만들어(何不慮以爲大樽)

강이나 호수에 띄워놓고 즐기려 하지 않습니까?(而浮乎江湖)



오히려 너무 커서(瓠落) 쓸모가 없다(無所用)고

걱정만 하고 있으니,(而憂其瓠落無所用)

선생은 참으로 옹졸한 마음(蓬之心)을 지닌 분이구려!(則夫子猶有蓬之心也夫)"





※혜자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그 이름은 혜시(惠施)다.

그는 제자백가 중에 명가(名家)에 속하는 유명한 논객으로 변설에 매우 능했다.


혜시(惠施)는 위(魏)나라 혜왕 때 재상을 지냈으며,  

진(秦)나라의 야심에 맞서서 여러 나라들의 힘을 합치자는 '합종책(合從策)'을 주장했지만, 

진(秦)나라를 위해서 '연횡책(連衡策)'을 주장했던 장의(張儀)와 불화하며,

위(魏)나라에서 쫒겨났다.


그 후, 혜시(惠施)는 고향인 송(宋)나라로 돌아와서

역시 송(宋)나라 사람인 장자(莊子)와 만나 벗이 되어 철학을 토론했다.

장자(莊子)는 혜시(惠施)에게서 '논리를 전개하는 기술'을 배웠다고도 한다.


뒤에 혜시(惠施)는 다시 위(魏)나라로 돌아가 '합종책(合從策)'을 추진하며, 유명한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당대에 많은 저술을 집필하고, 따르는 추종자들도 많았지만

오늘날에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장자(莊子)』에서 인용되고 있는.. '10개의 명제, 역설(歷物十事)'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결국 후세 사람들은 혜시(惠施)보다는 장자(莊子)를 더 높이 평가하고 기억하였다.



여기『장자(莊子)』에서..  혜시(惠施)는 줄곧 장자(莊子)와 논쟁을 벌이는 상대로 나온다. 


그런데 혜시(惠施)는 장자(莊子)보다 먼저 죽었는데,

장자(莊子)는 혜시(惠施)의 무덤가를 지나며

이제는 자신의 말상대가 없어져서 더 이상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였다.

장자(莊子)는 혜시(惠施)를 그리워하였던 것이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편」에서) 




 ※ 혜시(惠施)가 위(魏)나라의 재상을 지냈기 때문에

임금이 그를 잊지 않고 박씨((瓠之種))를 선물로 보내준 모양이다.


혜시(惠施)는 임금이 내려준 박씨를 먹지 않고 땅에 심어 잘 키웠는데

다섯 섬들이 엄청나게 큰 박(大瓠)이 열렸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큰 박(大瓠)을 가지고 고작 물을 뜨거나 

물이나 간장을 담아놓는 그릇으로 쓰려고 했으니, 제대로 쓰여질 리가 없다.


그는 큰 물건을 작게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夫子固拙於用大矣)

 

결국 혜시(惠施)는 큰 박(大瓠)이..'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다(大而無用)'고 투덜거리며, 

깨버리고 만다..(吾爲其無用而掊之)"



여기서 혜시(惠施)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드러난다.


혜시(惠施)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박(瓠)의 쓰임새, 용도, 효용성'에 비추어..

 '큰 박(大瓠)'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쓰임새, 용도, 효용성에 맞지 않으면..

그것이 곧 '쓸모 없음(無所用)'이라고 생각한다.



'쓸모없다(無所用)'는 것은.. 

그 사물의 '존재 이유, 존재 가치가 없다'는 뜻이 되며..

따라서 마땅히 '깨뜨려 없애버려도 되는 것'이 된다.



또한 여기서 사물의 쓰임새,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큰 박(大瓠)이 아니라,  '혜시(惠施) 자신'이다.


즉 '인간 자신의 욕구, 필요성'이 사물의 존재 가치와 쓰임새를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莊子)는 생각이 다르다.


장자(莊子)가 보기에..

천지만물은 '하나의 근원(根,本)'인 道에서 나왔으며,

모든 사물 안에는 '道가 내재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천지만물은 道를 드러내고 있다.'



천지만물은 자신 안에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한 道'를 품고 있으며,

'스스로 그러한, 자기 가치(自然, 道)'를 품고 있다.



한 송이 들꽃은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내재한 '스스로 그러한 道'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자연(自然)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것은 참으로 '무위(無爲)한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모든 사물의 존재 이유(自然, 道)이며,

참된 쓰임새(自然, 道)다. 



그러므로 자연(自然)한, 천지만물의 가치, 쓰임새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유한한 인간의 유위(有爲)하고 인위(人爲)하고 작위(作爲)한 생각과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은.. 아주 작다.

자연(自然)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오히려 인간은 천지만물 안에 내재한 가치, 자연한 道를 알아보는 눈을 떠야 할 것이다.




※  트지 않는 기술은 하나이지만,(能不龜手一也)

어떤 사람은 제후가 되고,

어떤 사람은 평생 손빨래 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사물의 가치, 그 쓰임새'를 보는 안목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則所用之異也)



장자(莊子)는 여기서..

크게 보고 크게 써서 크게 성공하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자(莊子)를 정말 오해하는 일이다.



장자(莊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쓰임새가 다르다, 그 쓸모가 다르다(則所用之異也)..' 는 것이다.


마치 붕새(鵬)와 메추라기가 다른 것처럼..


즉 '사물의 가치, 쓰임새를 보는 관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장자(莊子)는 바로 '관점의 전환,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장자(莊子)는 여기서.. 


'대이무용(大而無用)'이라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하는데,

이것은 뒤에 나오는 '무용이대용(無用而大用)'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대(大)'를 '道'라는 말로 바꿔보자.



흔히 도가(道家)철학에서..

'크다(大)' 혹은 '작다(微)'는 말은 '道'의 또다른 표현으로 사용되어 왔다.


'대이무용(大而無用)'은 바로 '도이무용(道而無用)'이다.

즉, 道는 쓸모가 없다.


그런데 '도이무용(道而無用)'은 '무용이대용(無用而大用)'이다.

즉, '쓸모가 없다'는 것은 가장 '큰 쓸모'가 된다.



道는..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아무 쓸모가 없다.(無所用)


道는 너무 커서(大) 혹은 너무 작아서(微)..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


道는 인간이 어떻게 인위적으로 해 볼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쓸모가 없다.(無所用)



인간은 '자연한 道'를 깨닫고 따를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무위자연(無爲自然)'할 수 있을 뿐이다.



道를 깨달았다고 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세상적인 가치와는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道는 쓸모가 없다.(道而無用)


그런 의미에서 道는 텅 비어 크기만 할 뿐, 아무 쓸모가 없다.


뒤에 나오는 '검은 소'처럼,

덩치만 클 뿐, 쥐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소처럼.. 말이다.  



그러나 道가 없이는.. 만물이 태어나지도 자라지도 죽지도 않는다.

천지만물도, 인간세상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참으로 크고 근본적인 쓸모는 바로 道에 있다.

의 무용(無用, 쓸모없음)에 있다.

의 무위(無爲, 함이 없이 함)에 있다.



 그러므로 장자(莊子)가 볼 때.. 

'무용이대용(無用而大用)', 쓸모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큰 쓸모'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莊子)는 혜시(惠施)에게 말하기를..


다섯 섬들이 큰 박으로.. 째째하게 물동이나 바가지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큰 배(大樽)를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우고

유유자적하게 즐기라고 한다.

 

바로 '소요유(逍遙遊)'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큰 것을 쓸 줄 모르는 혜시(惠施)에게(夫子固拙於用大矣)..

마치 꼬불꼬불하게 자라는 쑥(蓬)처럼..

곧게 자라지 못하고..  꼬여있는 마음, 

제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옹졸한 마음(蓬之心)'을 가졌다고 꼬집는다. 







 '소요유(逍遙遊)'란..

'마음이 절대적인 자유(自由)의 경지에서 노니는 것(遊)'이다.


이 절대적인 자유는.. 대소(大小), 장단(長短), 무용(無用)과 유용(有用)의 경지를 초월한..

즉 상대적인 가치 판단의 세계를 초월한..'초월적 행복의 상태'이다.


이것은 오직 '영혼의 각성과 변화(깨달음)'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무하유(無何有)의 세계'이니, 

불가(佛家)의 '무소유(無所有)' 혹은 유가(儒家)의 '낙천안명(樂天安命)'의 경지와도 같다.